“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큰 기회가 열린다는 뜻으로 쓰는데, 사실 가끔은 이 말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눈앞에 닥친 위기를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지는데, 위기 탈출에서 멈추지 말고 기회로 바꾸기까지 해야 한다니 너무하다 싶은 거죠.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봅니다. 취업 실패, 연인과의 이별이든, 불황이든, 인생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위기 모두를 곧이곧대로 '위기'로만 받아들이면 이를 극복할 엄두도 용기도 잘 나지 않을 테니, 이걸 '기회'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헤쳐 나갈 힘을 얻어보자는 의미라
고요. 그러니까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은, "위기를 기필코 기회로 만들어내라"는 명령형 문장이 아니라 "위기지만 기회로 생각해보면 어때?"라는 권유형 문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부담을 덜고 위기에 맞서다 보면, 그것이 실제로 기회가 되기도 할 테고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기 위기를 기회로 접근해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어낸 인물이 있습니다. "위기는 어떻게 기회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주인공,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린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 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리해 섭정, 즉 나라를 다스린 19세기 조선은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소수가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세도 정치가 성행하면서 왕권이 땅으로 떨어졌지요. 이는 경제적 위기로 이어졌는데, 권력을 잡은 소수 가문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궁핍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관리들이 매관매직, 즉 관직을 사고팔면서 문제가 심각해졌지요.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지방관들이 어떻게든 그 돈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세금을 엄청나게 뜯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가 문란하니 여기저기서 민란이 벌어졌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조선은 거의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왕조가 망해갈 때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있는데, 바로 지배 세력들의 횡포와 이에 따른 혼란입니다. 지배 세력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하다 보면, 백성은 큰 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어 결국 분노가 팽배해집니다. 나라의 근본은 민, 즉 백성이니 민심을 잃은 왕조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조선 역시 그런 왕조들의 전형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나타나 "이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노라" 하고 강하게 선언한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그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옛날로 돌아갈 기회‘로 보았습니다. 다시 왕권이 강력한 왕조 시대로 돌아가고자 개혁의 칼을 꺼내들었죠. 개혁의 목표는 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이었습니다. 도탄에 빠진 민심을 다독이고 어려움에 처한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죠. 대원군은 이 두 가지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먼저 왕권 강화를 위해 소수 가문이 장악한 비변사를 폐지했습니다. 비변사는 원래 군사와 관련된 중요 업무를 의논하던 기구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군사 업무의 중요도가 높아지자 비변사의 역할이 커졌지요. 이후 세도 정치 시기를 거치며 소수 가문이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행정, 군사 등 모든 권력을 비변사로 집중시켜 놓았습니다. 대원군은 이 권력을 분산시키지 않으면 왕권이 설 수 없다고 판단, '비변사 폐지'라는 말 그대로 철퇴를 내린 것입니다.
그의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법을 정비해 법전을 편찬하면서 기강을 잡고, 임진왜란 때 불타 폐허 상태로 남아 있던 경복궁 중건 사업을 벌이면서 왕실의 권위와 위엄도 보여주었죠.
이렇게 중앙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대원군의 칼날은 이제 지방으로 향하는데, 눈여겨볼 부분은 서원 철폐입니다. 당시 서원은 지역 양반들의 세력 기반으로 조선 후기 그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특히 나라에서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에는 토지와 노비, 서책 등이 지급되었고, 면세와 면역 등 각종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어요. 게다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수탈해원성이 높았습니다.
대원군은 이들 서원을 없애야 할 사회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47개소만 남기고 다 철폐해버리죠. 그러나 조선은 성리학의 질서와 세계관으로 움직이는 나라이고, 서원은 성리학의 이념을 전파하는 교육기관인데 여기다 손을 대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며 서원철폐를 취소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나섰죠.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 -<근세조선정감> 중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는 것은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뿐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유생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니,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파격적인 발언이었죠. 대원군의 이렇듯 밀어붙이는 기세는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에서도 거침없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세금 제도, 정확히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삼정은 전정, 군정, 환곡으로 전정은 토지세, 군정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포를 내는 것, 환곡은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였는데, 이 세 가지 제도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서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대원군은 먼저 전정과 관련해서는 토지 조사를 실시합니다. 당시 양반들은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죠. 한마디로 탈세를 한 건데, 이를 바로잡아 나라의 살림에 보태고자 한 것입니다. 또 군정과 관련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집'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했고요. 마지막으로 환곡과 관련해서는 관리가 아닌 민간인이 구휼 사업을 하도록 하는 사창제를 실시했습니다. 환곡의 문제점은 백성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도록 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어마어마한 고리대, 폭리를 취해서 돈을 번다는 거였어요. 심지어 곡식을 빌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도 환곡을 강요하고, 이자를 뜯어가는 관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곡 제도를 지역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한 것이죠. 즉, '세금 신고 투명하게 해', '양반들도 이제 특혜는 없어, 포 내', '관리들은 환곡에 개입하지 마. 백성들이 알아서 할 거야'라면서 민생 안정에 힘쓴 겁니다.
기울고 있는 조선호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던 흥선대원군, 나라의 위기를 찬란한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 기회로 본 그는 열심히 변화시키고자 했고, 개혁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청난 성과들을 거두었습니다. 물론 경복궁 중건 당시 돈이 모자라자 당백전이라는 고액 화폐를 발행해 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지는 등 여러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대원군의 개혁은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위기 앞에서 주저앉아 망연자실했다면 조선호는 정말로 침몰했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위기에 맞서는 사람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진리, 그의 개혁을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평생 성실하게 노를 저은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나이가 들어 더는 일할 수 없게 되자 배에서 내린 남자,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면서 자신이 한평생을 바친 배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배는 놀랍게도 해적선이었습니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했던 그의 평생의 노력이 약탈에 일조했던 겁니다. 이 남자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홍선 대원군은 분명 위기에 놓인 나라를 개혁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의 일정 부분은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죠. 문제는 개혁의 방향이었습니다. 세도 정치가 시작되기 전 조선에서는 변화의 움직임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흥선 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노력의 목표를 조선 왕조의 명맥 유지와 전제 왕권 강화에 두었다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대외 정책 역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는 외국과의 수교를 철저하게 금지하는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병인박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인양요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죠. 또 미국이 통상조약 체결 등을 요구하면서 강화도를 침략하는 신미양요를 겪는 등 조선은 서구 열강의 무력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흥선대원군의 선택은 더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추진이었습니다.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서양 세력과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웁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긴 했으나, 조선이 근대화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발전을 위해서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국 실패하기 마련이고, 제대로 된 평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대원군의 사례는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에 방향 설정을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진정한 위기 극복은 올바른 방향 설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1. 흥선대원군 1821-1898
본명은 이하응, 영조의 증손 남연군의 아들로 1843년에 흥선군으로 봉해졌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철종마저 후사가 없자,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왕실 종친들은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 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당시 후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은밀하게 손을 잡고 철종 사후 자신의 아들(고종)을 왕위에 올린다.
고종이 즉위하며 대원군에 봉해졌으며, 어린 아들을 대신해 국정을 장악했다. 세도 정치로 어지러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호포제 실시와 서원 철폐 등의 정책은 양반 유생들의 엄청난 반발을 일으켜 후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통상수교 거부 정책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성장한 서구 열강은 상품 판매 시장과 원료 공급지 확대 등의 목적으로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었고, 동아시아 지역 역시 그들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18세기 조선 주변으로 이양선이 출몰했고, 19세기에는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받았다. 처음에는 흥선 대원군도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 연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반 유생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뒤 서양 세력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벌인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도굴 미수사건 등이 발생했고, 흥선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며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에 척화비를 건립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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