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8월 15일이 광복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여기서 광복은 '빛을 되찾다'라는 뜻입니다. 1945년 그날은 암흑과도 같았던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빼앗긴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이죠. 그런데 우리가 나라를 되찾아야만 하게 만든 날,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긴 날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 기억하고 싶은 것, 기쁜 것, 이런 것만 기록해 놓은 게 역사가 아닙니다. 아픈 것, 상처 입은 것, 잊고 싶은 것, 지우고 싶은 것도 기억하는 게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라를 잃어버린 날도 기억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이날은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경술국치일, 즉 국권 피탈의 날입니다. 경술국치라는 단어가 생소할 수 있는데, '경술'은 1910년이 경술년이라서, '국치'는 '국가적 치욕'을 당했다는 뜻에서 '경술국치'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국권 피탈이 발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한국 지배를 인정받고 한국의 보호국화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죠. 이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는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이 파견한 통감으로부터 내정을 간섭받게 됩니다. 사실 이때 우리나라의 주권을 거의 다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을사늑약 때 이토 히로부미를 도와 체결을 거부하는 고종 황제 대신 조약에 서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라의 외교권을 팔아먹는 데 앞장선 5명의 적, 바로 을사오적이죠.
하지만 을사오적이 누구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이완용 이외의 나머지 4명의 이름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고, 추후에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한 명씩 살펴보겠습니다.
1) 이완용 - 학부대신이었던 그는 고종을 협박해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고, 이후 고종 강제 폐위와 한국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2) 박제순 - 외무대신이었던 그는 총리대신 서리로서 조선의 경찰권을 일본에 양도하고, 국권 피탈 이후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3) 이지용 - 전주이씨 왕족으로 내부대신에 오른 그는 을사늑약 체결을 위해 힘쓰고, 국권 피탈 이후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4) 권중현 - 농상공부대신이었던 그는 을사늑약 체결 후 의병 진압에 앞장섰고, 이후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일본이 만든 조선사편수회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5) 이근택 - 군부대신이었던 그는 국권 피탈 이후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이었던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모두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은 사람들로 중요한 나랏일을 맡은 덕에 부와 명예까지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배를 더욱 불리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고, 그 결과 이들은 더욱 잘살게 되었죠.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보상을 받아 아주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매국을 저지르기 전에도, 그 후에도 이들은 아주 잘살았습니다. 이들 을사오적을 설명할 때마다 저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됩니다.
'잘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잘살다'와 '잘 살다'의 차이를 아시나요?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텐데, 사전에 따르면 '잘살다'는 "부유하게 살다”라는 의미이고, '잘 살다'는 경우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잘 살다" 일 수도 있고, “좋은 삶을 잘 살았다" 일 수도 있죠. 을사오적은 부유하게 잘살긴 했지만, 좋은 삶을 행복하게 잘 산 인물들은 아닌 것이죠. 물론 부를 쌓고 잘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와 의미를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단지 돈이 많은 것만으로는 '잘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또 을사오적이 보여줍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을사오적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얘들아, 이 다섯 명이 우리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다. 내가 한 명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껏 욕해봐라.”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처음엔 웅성웅성합니다. 하지만 나중엔 "도그 베이비” 같은 단어들이 하나씩 튀어나오고, 마지막엔 아주 걸쭉한 욕이 쏟아집니다. 그럼 저는 또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험한 욕을 한 이 순간을 반드시 기억해라. 너희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책임질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 거다. 그때 이 순간을 떠올리기 바란다. 너희들이 욕한 을사오적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야. 하지만 죽어서도 역사 시간마다 불려 나와 이렇게 욕을 먹지 않니? 이들에게 역사의 단죄를 내린 너희들의 모습을 잊지 마라. 그럼 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이기적인 결정이나 훗날 자기 이름을 더럽힐 잘못된 선택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의 시간은 그런 의미가 되어야 한다."
이제 세상에 없는데도 역사 시간만 되면 강제로 소환돼 이름이 불리고 욕을 먹는다는 것,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삶,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 있지 않으니 자신이 욕먹는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요? 을사오적은 당시에도 국민의 공분을 사며 울분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을사오적 암살단이 조직될 정도였죠.
당시 대신이었던 민영환은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2,000만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언론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을사오적을 매우 준엄하게 비판했죠. '시일야방성대곡'은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인데, 저는 처음 이 사설을 읽었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나라가 외교권을 잃어버린 그 순간에 내가 살고 있다면, 그때 이 사설을 읽었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지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동포들을 향해 울부짖으며 을사오적을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비판한 장지연. 그런데 장지연은 훗날 “드높도다 그 기기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라며 한 사람을 치켜세웠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장지연의 말은 그의 묘비 뒷면에 추모사로 남아 있습니다. 베델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휘청이던 시기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의병의 활동을 보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 본부, 국채 보상 운동 의연금 총합소 역할을 했으며,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 호외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원문이 바로 이겁니다.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들이
출세와 부귀를 바라고
거짓 위협에 겁을 먹어 뒤로 물러나 벌벌 떨며
매국의 역적이 되기를 달게 받아들였다.
4,000년 강토와 500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2,000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드니
,,,,,
아! 원통하고, 아! 분하도다.
우리 2,000 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중에서
베텔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 때 우리 국민들이 줄지어 추모를 했습니다.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누구보다 우리나라를 위해 힘쓴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베델은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는데, 베델의 묘 옆에는 헐버트의 묘도 있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을사늑약 후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자신의 조국 미국으로 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고종에게 헤이그특사 파견을 건의하는 등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운동에 힘썼죠.
우리나라 사람, 그것도 시대를 대표하는 엘리트이자 나라를 다스리던 대신들이 팔아먹은 그 나라의 독립을 위해 타국의 이방인들이 헌신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잘살고, 또 잘 살기를 원할 겁니다. 이를 위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지금의 이 감정을 기억한다면, 현명하게 잘 사는 길을 택하게 될 거라 믿습니다. 당시에는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지금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는 을사오적을 잊지 않는다면, 나의 이름을 더럽힐 결정은 내리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1. 을사늑약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대한 제국에 재무는 일본인에게, 외교는 미국인에게 모두 맡기는 내용의 제1차 한일 협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후 일본은 대한 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제2차 한일 협약을 체결한다. 1905년에 체결된 이 협약을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 하여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했으며,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고, 민영환 자결로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파견했다. 나철,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자신회를 결성했으며, 안중근은 초대 통감이자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2. 민영환이 2,000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나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영환은 죽고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발하고 기운을 내어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며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두운 저승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제국 2,000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일
3. 호머 헐버트 1863~1949
미국 버몬트 출생, 1886년 소학교 교사 요원으로 초빙돼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육영공원에 재직하며 한글로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했다. 일제의 압박을 보며 조선의 정치나 외교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고종의 외교 보좌관 역할을 맡는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다 실패했다. 영문 잡지인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고, 고종에게 헤이그특사 파견을 건의하는 한편 본인 역시 헤이그로가 회의시보<Courier de la Conferénce>에 우리 특사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러 저술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독립 후인 1949년에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으며, 한국에서 눈을 감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어니스트 베델 1872~1909
영국 브리스톨 출생, 열여섯 살부터 일본 고베에서 무역업을 하다 1904년 <데일리 메일>의 특파원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왔지만 일본의 만행을 보고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런던 신문사에 고종의 친서를 싣는 등 나라 안팎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며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호머 헐버트와 함께 일본인에 의한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무단 반출을 비판하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국제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내 석탑 반환에 기여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으며,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
'인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의 품격 3 - 삶은 끊임없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0) | 2022.06.05 |
---|---|
인생의 품격 2 - 평생 동안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0) | 2022.06.04 |
일생일문 9 – 위기는 어떻게 기회가 되는가 (0) | 2022.06.02 |
일생일문 8 – 성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 (0) | 2022.05.30 |
비양도 - 하늘에서 날아온 섬 (0) | 2022.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