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증후군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 땅속 깊이 굳건히 뿌리를 내렸고, 굵고 튼실한 나무 둥치를 따라 올라가면 풍성한 가지에 주렁주렁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를 매달고 있는 그런 사과나무.
당신의 건강을 생각해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머릿속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라. 딱 한 그루면 된다.
사과나무를 그렸다면 그 나무에 매달린 사과들을 보라. 빨갛고 먹음직스럽게 열린 사과들은 독이 든 사과다. 어떤 사과는 ‘비만’이라는 독이 들었고, 또 어떤 사과는 ‘내당능 장애’와 ‘당뇨병’ 독이 들었다. ‘이상지혈증’ ‘동맥경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사과는 각각 이 모든 질병을 나타낸다.
복잡하고 어려운 병명도 더러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가 예전에 ‘성인병’이라고 한 번쯤은 들어본, 그리고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한 질병들이 요즘엔 성인병 대신 ‘생활습관병’이라는 말을 쓴다. 이유는 대사증후군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질병의 사과들이 모두 한 나무에 열려있다는 것이다. 즉 나이가 들어가면 우리를 괴롭히는 대부분의 만성질환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의사들도 심장병, 당뇨병, 뇌졸중, 고혈압 등을 별개의 질환으로만 생각했고 당연히 치료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모든 질환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며 한 가지가 발병하면 다른 병도 함께 생기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됐다. 뿌리를 나눈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병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무엇일까. ‘인슐린 저항성’이 답이다. 인슐린은 잘 알려진 대로 혈당을 조절하는 호르몬이다. 다만, 과도한 스트레스 등의 원인으로 인해 혈중에 인슐린이 충분히 있어도 포도당을 세포 속으로 넣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인슐린 저항성’이라고 부른다. 인슐린 저항성이 생긴 상태에서는 인슐린이 많이 나와도 포도당 운반이 여전히 원활하지 않다. 때문에 췌장은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인슐린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이 때문에 혈중 인슐린 농도가 엄청나게 높은 고(高)인슐린 혈증이 온다. 이렇게 계속해서 많은 양의 인슐린을 만들어 내다보면 췌장도 지치게 마련. 더 이상은 인슐린을 대량 생산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그러면 더 이상은 적절히 혈당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다 아는 대로 당뇨병이다.
문제는 당뇨병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차용수 교수는 “인슐린은 혈당을 조절하는 역할 이외에도 다양한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인슐린이 많이 나오는 고인슐린혈증 상태가 되면 그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인슐린은 세포가 자라고 커지게 하는 작용이 있어 혈관벽을 두껍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지방분해 효소를 자극해 분해된 지방을 내장에 저장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신장에서 나트륨의 재흡수를 촉진해 수분이 배설되지 않고 몸에 쌓이게 된다. 그래서 고인슐린혈증이 생겨 인슐린 농도가 높아지면 인슐린의 이 모든 작용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인슐린 저항성’은 혈관세포를 증식시켜 혈관벽을 두껍고 단단하게 만들어 혈압이 높아지게 되고(고혈압), 지방분해를 촉진해 분해된 지방 성분이 피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고지혈증). 동시에 이런 지방성분은 내장에 저장되면서 복부비만을 부른다.
지질대사에 이상이 생기면서 중성지방은 많이 쌓이고, 몸에 좋은 콜레스테롤(HDL) 농도는 떨어진다. 신장에서는 나트륨(염분)을 배설하지 않아 수분이 축적되면서 혈압은 더 올라간다(몸이 잘 붓고, 심하면 신부전 등 신장에 이상이 생긴다). 요산 농도가 높아져 통풍이라는 질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혈전(피떡)이 잘 생긴다. 한편 인슐린 저항성 때문에 인슐린 농도가 아무리 높아도 혈당조절은 잘 안된다. 그러니 포도당이 풍부한 피는 더욱 끈적끈적해진다. 피가 탁해지고 혈관이 망가지고(동맥경화) 혈압이 올라가니 혈관의 약한 부위가 터지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뇌혈관에서 일어나면 뇌졸중이 되고, 심장의 혈관에서 생기면 관상동맥 질환이나 기타 심장병이 되는 것이다. 당뇨병으로 인한 각종 합병증(당뇨발. 눈의 망막 질환 등)도 똑같은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모든 상태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말이 바로 대사증후군(Metabolic Syndrome)이다. 최근 미국의사협회지(JAMA) 보고에 따르면 이전에 심혈관질환·암·당뇨병 등이 없던 1209명을 11년간 추적한 결과 대사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 비해 심장병을 일으키는 관상동맥 질환이 생길 위험도가 3.8배 높았으며 심혈관계 질환으로 결국 사망할 위험도 3.6배 더 높았다.
다시 사과나무로 돌아가 보자. 심장병. 당뇨병, 뇌졸중, 고혈압 등의 열매를 맺는 이 나무의 뿌리는 ‘인슐린 저항성’이다. 굵은 나무 둥치는 ‘고인슐린혈증’ 이다. 그리고 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대사증후군’이다. ‘인슐린 저항성’은 고인슐린혈증을 부르고 고인슐린혈증이 생기면 피가 탁해지고 혈관이 약해져 심장병, 당뇨병, 뇌졸중, 고혈압 등 만병을 낳는다는 얘기다. 이렇듯 만병의 근원이 인슐린 저항성이라는 것이 대사증후군의 핵심이다. 의학적으로는 복부비만, 당뇨, 고밀도콜레스테롤(HDL), 고혈압, 고중성지방 등 5가지 지표 중 3가지 이상이 기준치를 초과하면 대사증후군으로 진단한다.
그렇다면 인슐린 저항성이 왜 생기는 걸까? 아직은 그 해답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인슐린저항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지는 확실한 인자가 몇몇 있다. 이 몹쓸(?) 사과나무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토양성분과 비료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져 있다.
우선은 비만이다. 그것도 내장 비만이 주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노화도 영향을 미친다. 과식과 운동 부족도 빼놓을 수 없는 인자다. 또한 유전적인 요인도 있다. 비만과 노화 등이 인슐린 작용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고장내는 데 관여하고 과식·운동부족 등이 이를 증폭시킨다.
때문에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반면 신체 활동량은 급격히 줄어든 현대인에게 대사증후군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심장협회(AHA) 통계에 따르면 미국 성인 4명 중 한 명은 대사증후군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국립 콜레스테롤 교육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복부비만 기준은 한국인에게는 너무 관대하기 때문에 아시아태평양 동맥경화학회에서 제시한 기준인 허리둘레 남성 96cm 이상, 여성 80cm을 적용하면 한국 성인 남성의 30%, 여성의 15%가 대사증후군이다. 이는 전체 인구의 22%에 해당한다. 연세대의대 노화과학연구소 조홍근 교수에 따르면 이는 2004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산출된 아시아 각국의 유병율 중 최고치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대사증후군이 가장 많은 나라라는 뜻이다. 연령대별로는 남성은 30대 이후 계속 증가에 40대에 거의 40%에 육박하면서 최고치에 달했다가 50대 이후 조금씩 감소하는 반면, 여성은 40대 까지 10% 미만에 머물다가 폐경기를 지나면서 50대 이후 두 배 이상 가파르게 증가해 이후 나이가 들수록 계속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사증후군을 예방하는 방법은 물론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인슐린저항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미국 당뇨병협회가 권하는 ‘넘버 원’ 치료법은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부작용 없는 치료법이다. 예전에 성인병이라 불렀던 당뇨·고혈압·심장병·뇌졸중을 ‘생활습관병’으로 고쳐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모든 병의 근원인 인슐린 저항성을 치료하려면 생활습관부터 확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영동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안철우 교수는 인슐린 분비의 부담이 적은 저(低)혈당지수 음식을 먹으면서 비만을 줄이고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저혈당지수 음식은 섬유질이 풍부한 ‘거친 음식’이다. 현미 등 잡곡밥, 호밀빵, 메밀국수, 콩 등 각종 야채는 소화된 후에도 혈당을 천천히 올리는 음식이기 때문에 인슐린이 갑자기 많이 분비돼야 하는 부담이 적다. 흰 쌀밥, 밀가루 음식, 정제된 설탕이 든 음식 등 끝에서 바로 단맛을 느끼게 하는 식품은 먹자마자 혈당이 확 올라가게 만든다. 그러면 인슐린도 순간적으로 많이 분비돼야 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인슐린 분비에 이상이 생겨 인슐린 저항성을 초래하게 된다.
꾸준한 운동도 인슐린 저항성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국 당뇨병협회에 따르면 하루 30분씩 활달하게 걷기만 꾸준히 하면 고인슐린혈증이 치료되고 혈압이 떨어지면 당뇨병 발병 위험은 크게 감소한다. 물론 체중 감소 효과도 있다.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삼성서울병원 내분비내과 이문규 교수는 “일단 대사증후군으로 진단되면 인슐린 저항성 자체를 줄여주는 ‘인슐린 증감제(Sensitizer)’를 사용해 앞으로 닥칠 만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고혈압·당뇨관상동맥질환 등이 진단된 경우에도 인슐린 저항성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를 병행하면 치료 효과를 훨씬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사증후군을 인간의 진화 방향에 역행한 급속한 생활 변화에서 찾기도 한다.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낼 수 있는 자가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으나 최근 10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생활은 온갖 기름진 먹거리에 몸을 거의 쓰지 않을 정도로 편리하고 풍족해졌다. 진화의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활양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은 대사증후군에 특별히 취약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초식동물’에 가까웠던 한국인에게, 서양인에게는 거의 l00년에 걸쳐 일어난 생활의 변화가 최근 20-30년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구형 식사 패턴이 도입되고 육류 섭취가 늘어나면서 한국인의 평균 콜레스테롤 수치는 1990년까지만 해도 평균 161mg/ml였으나 2002년에는 191mg/ml, 현재는 200mg/ml을 넘어섰다. 게다가 유전적으로도 한국인은 중성지방을 처리하는 능력이 서양인에 비해 떨어진다. 대사증후군과 관련된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증가하는 것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현재 한국인의 3대 사망 요인은 암. 뇌졸중, 관상동맥 질환이다.
1980년대 말 한국인 10만 명당 관상동맥 질환(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10만 명당 7명이었지만 2002년에는 10만 명당 25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경희의료원 내분비내과 오승준 교수는 “이제는 당뇨나 고혈압. 관상동맥 질환 등을 치료할 때도 ‘대사증후군’이라는 큰 숲을 보고 총체적으로 관리해 나가야 한다”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사·운동 등 기본적인 생활 습관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대사증후군의 사과나무에서 반드시 기억해둘 것은 사과나무의 뿌리인 인슐린 저항성을 치료·예방해서 나무 둥치에 해당하는 고인슐련 혈증이 오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여기서 파생되는 온갖 생활습관병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식하지 말고 하루 30분씩 부지런히 움직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부디 ‘한 그루의 사과나무’ 얘기를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시길. 당신 삶의 후반부를 완전히 바꿔놓을 ‘인생의 사과나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주간조선 1852호에서 인용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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