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찬욱 (2003년, 한국)
등장인물: 라마 한찬 마야(찬드라 꾸마리 구룡), 오달수(경찰서장), 김익태(정신과 의사), 백지원(부녀 보호소 직원), 이재용(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
배경: 20세기, 한국 네팔
상영 시간: 28분 (12세 관람가)
무관심과 무능, 안일함이 빚어낸 총체적 비극
믿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정신병자로 오인 받아 육 년 남짓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던 네팔인 여성 노동자 찬드라 씨의 실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화면 대부분을 찬드라 씨의 시점 숏으로 찍고, 감독 자신이 직접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찬드라 씨와 관련된 가해자들의 모습을 촘촘히 화면에 엮어 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찬드라 씨는 실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도 다른 네팔 여성이 대신 연기한 것입니다. 감독이 네팔에 찾아가 찬드라 씨를 직접 인터뷰하며 영화를 마무리한 것은 주제에 알맞은 성실한 접근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점은, 이 나라에서 온전히 이방인인 찬드라 씨의 눈에 비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찬드라 씨의 입장에서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줄곧 카메라의 높이의 거리, 깊이, 화면의 톤 등을 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드라 정신병원에 집어넣기(방치하기) 프로젝트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을 마주하다 보면, 그동안 ‘이주 노동자'를 무심히 지나쳤거나 은연중에 차별해 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1990년대 어느 날, 서울의 한 공장에서 보조 미싱사로 일하던 찬드라 꾸마리 구룽은 공장 근처 분식점에서 라면을 시켜 먹습니다.
뒤늦게 지갑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찬드라 씨는 계산을 못해 쩔쩔매고, 식당 주인은 그녀를 경찰에 넘깁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그녀를 경찰은 행려병자 취급합니다. 결국 찬드라 씨는 정신병원, 그다음엔 부녀보호소로 이송됩니다.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네팔인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 후로 육 년 사 개월 동안 격리 시설에서 갇혀 지낸 것입니다.
경찰은 "(네팔 사람은) 생긴 게 우리랑 똑같아 정말 헷갈린다."며, “아니, 우리가 언제 네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야죠."라고 변명합니다. 정신병원 의사들은 의사소통이 안 되고 눈을 맞추려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찬드라 씨를 우울증 환자라 진단합니다. 하지만 치료비도 지불할 수 없는 신원불명의 환자를 장기간 떠맡아 주는 병원은 없습니다. 병원에서는 네팔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지만, 영사관에서는 네팔 말을 하는 직원이 없다며 다시 경찰에 책임을 떠넘깁니다. 경찰 역시 자신들이 맡을 수 없는 일이라며, 찬드라 씨를 부녀보호소로 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찰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나중에 알고 보니 (찬드라 씨는) 다른 네팔인에 의해 실종 신고가 되어 벽보가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듯이…."라고 말끝을 흐리다가 "사실 우리가 몰랐다기보다는 뭐, 솔직히 까먹은 거지 뭐~!"라는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찬드라 씨가 부녀보호소로 이송되자, 보호소 직원은 여기가 정신병 고쳐 주는 곳이냐고 짜증스레 말합니다. 찬드라 씨가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오 년 후’라는 자막이 뜬 다음, 보호소 내 담당 의사는 "도대체 무슨 말이 통해야 치료를 하죠?"라고 반문합니다.
한국에서 고통을 당하는 부분에 찬드라 씨는 목소리로만 등장합니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찬드라가 만난 사람들 - 분식집 주인, 공장주, 경찰, 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 부녀보호소 직원, 출입국 관리사무소 직원, 파키스탄 노동자 - 과 그들의 불편한 ‘시선'입니다. 그래서인지 찬드라 씨의 눈에 비친 세상은 비정한 느낌의 청회색으로 채워집니다. 하나의 답만을 가진 사회를 상징하듯 모노톤의 화면입니다. 하지만 네팔에서의 인터뷰 장면은, 아름다운 자연과 네팔인들의 원색적인 의상만큼이나 다양하고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신병자에 행려병자, 신원불명자 취급받던 찬드라 씨였지만, 박찬욱 감독이 네팔에서 수소문 끝에 찾아낸 찬드라 씨는 얼마나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던지……. 이는 흑백 화면(한국)과 컬러화면(네팔)만큼이나 뚜렷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잡아 낸 이 두 공간의 간극에는 약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 사회적 폭력에 대한 불감증이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팔에 온 박찬욱 감독은 찬드라 씨에게 "한국의 정신병원에 다 합쳐서 얼마나 있었어요?"라고 묻습니다. 찬드라 씨는 “육 년 사 개월이오."라고 똑똑한 한국어 발음으로 대답합니다. 소수자에 대한 무관심이 한 인간을 얼마나 끔찍한 세월 속에 가두었는지를 ‘육 년 사 개월'이라는 구체적 숫자로 관객에게 각인시키려는 직설 화법인게지요.
마지막 장면,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국인 스태프의 모습을 네팔인이 내려다봅니다. 그가 앉아 있던 담벼락에 쓰인 글씨, 네팔(NEPAL) 이라는 국명을 Never Ending Peace And Love라고 풀어 쓴 문구를 클로즈업시키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문구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의 영어 제목으로 사용되습니다.
1. 영화의 소재가 한국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90퍼센트 이상을 국내에서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찍은 부분에 찬드라 씨의 얼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인권'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세요.
길잡이: 사전 인터뷰에서 감독은, 과거 있었던 일을 재연해야 했는데 찬드라 씨는 이미 네팔로 돌아간 상태였고 연기를 할 수 있는 네팔인 여성을 찾지 못해 고육지책으로 시점 숏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전부터 이방인의 눈으로 본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찬드라 씨의 비극은 특정한 악인의 괴롭힘 때문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능, 안일한 대응이 합동으로 빚어낸 사건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이 같은 총체적 무관심을 보여 주고 싶었기에 시점 숏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단편치고는 비교적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되었으며, 정작 주인공은 화면에서 빠져 있지만 대신 주인공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천태만상의 그려 내 관객에게 역지사지의 감정을 일으킵니다. 시점 숏은 한국에서 고통을 당한 주인공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의 시선에 맞추어 따라간다는 점에서도 ‘이주 노동자의 인권'이라는 주제와 잘 맞아떨어지며,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2. 부녀보호소에서 주어진 이름 '선미' 대신 찬드라 꾸마리 구롱'을 고집하고 네팔인 사업가가 찬드라 씨를 찾아와서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이야기하자 “네팔 사람 아니야!”라고 말하는 찬드라 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나요?
3. 이주 노동자가 한국에서 받고 있는 차별 사례를 살펴보고, 이러한 차별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길잡이: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 · 자유 · 행복을 주구하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곁에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인종적 편견, 임금 체불, 불법 체류자라는 불안한 신분 등으로 단 하루도 편안히 살아갈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간에 우리의 필요로 채용한 이주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닳도록 써먹은 다음 규제를 강화해 차별하고 내몬다면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이주 노동자들은 “유엔 이주민 협약에서는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이주하고 노동할 권리 - 인간의 기본권 - 가 어느 국가에서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는 1990년 유엔총회에서 통과되어 국제 인권 규약으로 효력을 가지게 된 내용이며, 이주 노동자 또한 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 협약 비준 요구에 대해 시기상조 운운하며 이주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인권보다 경제적 논리와 비뚤어진 우월감이 앞선 것입니다. 한국은 대외적으로 유엔 인권 이사회 이사국이며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인권 실천력과 개개인의 인권 감수성은 매우 낮은 편입니다. 2007년 2월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 때 정부의 태도나, 2008년 이후 더욱 격심해진 불법 체류자 집중 단속과 출입국 관리법 개악 시도 등은 한국의 부끄러운 인권 수준을 여지없이 보여 줍니다. (윤희윤 / 『세상을 껴안는 영화읽기』 / 문학동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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