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정지우 (2006년, 한국)
등장인물: 이진선(진선), 오태경(현이), 김춘기(노래방 주인), 김기천(택시 기사)
배경: 21세기, 한국
상영 시간: 27분 (15세 관람가)
새터민은 '먼저‘ 온 미리입니다.
평화(平和)의 한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평등하게(平) 곡식(禾)이 입(口)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한마디로 더불어 ‘밥'인 셈입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5)에서도, “어찌 이리도 마을이 평화로울 수 있느냐?"는 인민군 장교의 물음에 촌장은 '뭘 마이 미기야 대(뭘 많이 먹여야 돼).”라고 대답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는 문제는 평화·인권과 직결되는 듯합니다. 우리가 흔히 탈북자라 부르는 새터민의 인권도 이렇게 아주 단순한 시각으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홍수와 기근이 있었던 1995년부터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건너오는 주된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즉 '먹는' 문제였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95년 한 해 동안 북한 주민 300만 명 이상이 아사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 한 해 열 명 정도에 불과했던 탈북자 수는 1997년부터 급증했고, 2015년 통계에 따르면 탈북자 수는 총 2만 8천여 명으로 추산됩니다. 탈북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들의 남한살이는 탈북 과정만큼이나 험난하게 변했습니다.
'배낭을 멘 소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세 번째 인권 영화 <다섯 개의 시선>(2006)에 속한 단편으로, <해피 엔드〉(1999), <사랑니>(2005), <모던 보이>(2008) 등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의 작품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탈북 청소년들을 '나이 어린 이산가족'이라 정의했던 정지우 감독은, 북한 소녀의 눈에 비친 남한 사회의 냉정함과 편견을 보여 주는 데 치밀한 공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소년들 틈바구니에 끼어 대사관의 담을 넘으려다 실패하고 중국 공안에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4:3 비율의 앵글 안에 '2000.1.11. AM 03:01' 라고 실시간이 표시되어 마치 CCTV 화면을 편집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합니다. 화면이 어두워진 후, “소녀는 북송되었다가 다시 국경을 넘고 태국을 거쳐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라는 자막이 뜹니다.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도록 밝게 비쳐 드는 햇살을 바라보는 자유도 잠시, 목숨을 걸고 대사관 담벼락을 넘었던 소녀 진선은 남한 사회에 더 큰 장벽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진선을 에워싸고 "북한에서는 시체를 먹는다며 너, 인육 먹어 봤냐?"라며 낄낄댑니다. 말문이 막힌 진선은 수화로 "아냐. 그건 아니야.” 라며 벙어리 행세를 합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위축되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진선의 내면을 보여 주는 한편, 진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의 비틀린 편견을 구체적으로 그려 냅니다.
어느 날 진선은 오토바이 퀵 서비스 일을 하는 탈북 소년 현이를 만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인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둘 다 보호자 없는 탈북 청소년이긴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여성인 진선이 부당한 일을 더 자주 겪습니다. 노래방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사십 대 남자 주인은 자존심 상하는 말을 던지고 뺨을 만지며 함부로 대합니다. 게다가 너저분한 구실을 붙여 월급까지 깎습니다. 진선은 현이를 찾아가 필담으로 도움을 청하고, 둘은 배낭을 메고 오토바이에 오릅니다. 억울하게 깎인 월급 액수만큼 1,000원짜리 콜라를 담아 오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은 문 닫힌 노래방에 들어가 커다란 냉장고에서 콜라 오십 개를 꺼내 배낭에 담습니다. 오토바이가 배낭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자 이들은 택시를 잡아탑니다. “조선족이신가? 어디에서 왔나?"라는 택시 기사의 질문에 현이가 북한에서 왔다고 정직하게 대답하자, 기사는 택시를 세우고 경찰서로 달려갑니다. 두 아이는 요금 18,480원 대신 콜라 캔 열아홉 개를 가지런히 놓고 도망칩니다. 집에 돌아와서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진 진선은 현이에게 가서 "노래방에 콜라 도로 갖다 놓고 싶습니다. 우리 사장님이 북한 사람 전부 도둑놈이라고 평생 얘기하고 다닐 겁니다." 라고 쓴 쪽지를 보여 줍니다.
투덜대면서도 진선의 말을 따르는 현이를 향해, 진선은 남한에 온 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남조선 애들보다 오토바이 천천히 타시오."라고 말합니다. 현이는 "내가 남한 애들보다 잘하는 게 오토바이 타는 것밖에 없는데……."라고 답합니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뒤에 “1984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으로 태어난 소년은 2003년 1월 대한민국 시민으로 사망하였다.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라는 자막이 흐릅니다.
이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안으로 진선과 현이가 질주하는 엔딩 장면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자막으로만 처리되는 현이의 비극적 죽음은, 홀로 남한에 내려와 의지할 곳 없이 살다 이 년이 안 돼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 열아홉 살 소년의 실화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1. 2006년 1월 통일부에서 제정한 용어 '새터민'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길잡이: 새터민이란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새터민은 북한 공민권을 소유하고 있다가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로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을 지칭하며, 주민등록증은 물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고 있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한 해 열 명 정도에 불과했던 새터민의 수는 1997년부터 급증했고, 2015년 현재에는 2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온 미래'인 새터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과 더불어 통일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새터민은 남북이 통일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할 사람들이며, 통일 후의 남북한 융화를 미리 시험하기 위한 리트머스 종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이 영화에서, 똑같은 새터민이라도 여성인 진선은 더 큰 차별과 부당함을 겪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길잡이: 분단 후 오십 년 넘게 지녀 온 골 깊은 적대감, 이십년 넘는 군사 정권 시절에 주입된 반공의식, 그리고 경제적 우월감 때문에 탈북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인들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는 현실 때문에 새터민들은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고, 가족을 버리고 온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힘겹게 삶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새터민의 부적응은 눈앞의 경제적 어려움부터 유·무형의 차별, 소외와 고립, 이에 따른 정신적 외상과 심리 문제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특히 탈북 청소년의 경우 교육 수준의 격차가 심하고 정부의 지원 또한 한정적이기에 아직까지도 상당 부분 민간기관과 시민단체의 후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검정고지 혹은 대안학교를 통해 힘들게 학업을 이어 가거나 아예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까닭에 성인보다 부적응 정도가 더욱 심각합니다. 청소년기는 더욱 또래와 자신을 비교하며 정체성에 혼돈을 느낄 때인데, 부모님은 물론 일가친척 하나 없고 게다가 여성이라는 조건까지 더해진 무연고 탈북 소녀에겐 영화 속 진선 이상으로 기막힌 차별이 빈번히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3. 새터민에 대한 교육과 정착금 지원 등의 제도적 뒷받침은 이주 노동자의 경우에 비하면 다소 나은 듯하지만, 사회적 편견에 시달린다는 점에서는 새터민이나 이주 노동자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외에도 <국경의 남쪽>(안판석, 2006), 〈크로싱> (김태균, 2008) 같은 영화를 통해 탈북 과정의 어려움과 새터민의 현실을 살펴봅시다. (윤희윤 / 『세상을 껴안는 영화읽기』 / 문학동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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