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년 넘게 동맹을 이어온 신라 진흥왕에게 배신당한 백제 성왕,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등 역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배신이라고까지 표현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이 실망을 안겨주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책임감 강하고 똑똑하다고 판단해 '팀플' 과제 발표를 맡긴 친구가 발표 당일 연락이 두절된다거나, 좋은 상사라고 여겼던 사람이 내 성과를 몰래 가로챈다거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내 욕을 하고 다녔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이런 일들을 겪고 나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대체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고 따를 만한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신뢰의 조건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인생의 스승으로 삼기에 충분한 인물을 소개할 텐데요, 바로 조선 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입니다.
지금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이황의 얼굴을 한번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리학자의 이미지처럼 엄격하고 깐깐하게 제자들을 대하는 꼬장꼬장한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하지만 퇴계 이황은 요즘 말로 정말 '쿨'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열린 사고를 가진 선비였습니다.
특히 고봉 기대승과의 논쟁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죠.
기대승은 과거 급제 후 당시 큰 학자라 할 수 있는 이황을 찾아가 정중하게 만남을 청했고, 이황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패기 넘치던 신출내기 유학자 기대승은 이황의 성리학 이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이에 대해 이황이 기대승에
게 편지로 답하면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지는데, 이 논쟁은 무려 8년간이나 지속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단칠정에 대해서만 8년간 논쟁이 펼쳐졌고,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은 기간은 총 1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대승은 서른두 살, 이황은 쉰여덟 살로 아버지와 아들뻘인데다 벼슬도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단 종9품,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인 반면 이황은 당시 3품인 성균관 대사성을 마치고 공조참판 자리에 올랐지요. 성균관 대사성은 지금으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급이고 공조참판은 장관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와 직급의 까마득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기대승을 학자로서 존중하며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이들의 토론은 기대승이 의문을 제기하면 이황이 이에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토론은 무척 첨예했지만 항상 서로에게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려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기대승이 어리지만 워낙 뛰어나서 존중했던 것 아니냐고요? 이황은 기대승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를 항상 예로써 대하고 공경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지체가 낮고 어린 제자도 소홀히 대접하지 않았으며, 친구를 대하듯 예를 갖추어 대했다고 합니다. 또 이황은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은 신분과 관계없이 제자로 맞았는데,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신분은 천하지만 학문을 무척이나 좋아한 대장장이가 있었는데, 이황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면 뜰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매우 열심히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를 본 이황이 그를 불러 강의 내용에 대해 물으니 대부분 이해했고, 이후 이황은 그 대장장이와 제자들을 함께 가르쳤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대장장이는 철상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한 후 그 앞에서 공부를 했으며,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생활하면서 매일 철상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조선 사회에서 대장장이는 상민 신분이었는데,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이황은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은 차별하지 않고 가르쳤고, 제자는 그 은혜를 스승의 사후에 까지 갚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이황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존중했습니다. 그가 아끼던 맏손자 이안도가 아들을 낳아 증손자를 얻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황은 크게 기뻐하며 편지로나마 증손자의 건강을 살뜰히 살폈습니다. 하지만 이안도의 아내가 아이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다시 임신을 해 젖이 끊겼고, 어머니의 젖을 충분히 먹지 못해서인지 이황의 증손자는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그 와중에 딸을 출산한 아내가 여전히 젖이 모자라서 어려움을 겪자 이안도는 이황 집에서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종을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를 본이황은 손자를 크게 꾸짖습니다.
그 여종은 천민이었고, 당시는 노비가 집안의 재산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황에게 그 여종은 노비이기 전에 한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의 증손자를 위해 그 여종의 아이를 희생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죠.
우리가 익히 아는 이황은 주자의 사상을 깊이 연구해 성리학의 기초를 형성한 유학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이황은 여종의 자식, 대장장이 제자에게까지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을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퇴계(退溪), 그의 호처럼 이황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신분, 관직 등으로 지배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나 진심과 정성으로 사람을 섬기고 배려로 다스린 진정한 학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이런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이황을 통해 알 수 있는 신뢰의 조건은 존중과 배려, 예의입니다.
“남의 자식을 죽여
자기 자식을 살리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어쩌면 좋으냐.
꼭 여종을 보내야 한다면
여종의 아이도 같이 보내
두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자기 아이를 버려두고 가게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 할 노릇이다.
- 1570년 4월 5일, 이황이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
나를 늘 배려하고 존중하며 예의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황의 '한결같음‘입니다. 이황은 누구에게든 언제든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상대의 신분이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자신이 교단에 섰을 때는 일상생활을 할 때든, 늘 상대를 존중했죠. 이 한결같은 태도는 신뢰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사 나를 늘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일지라도, 만약 그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막 대한다면 어떨까요? 지금은 내가 필요하고 나를 좋아해 예의로 대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내게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 장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황의 배려와 존중
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든 누구에게든 한결같았기 때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지를 판단할 때도 그렇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신뢰를 주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겠죠.
'한결같음'이 신뢰의 제1조건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이상적의 이야기입니다.
김정희는 18세기 말 꽤나 권세 있는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조가 무척 사랑한 딸인
화순 옹주의 증손자인 데다 그의 아버지 김노경도 조정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죠. 서른네 살에 과거에 급제한 김정희는 조정의 각종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이후 효명세자의 스승이 되면서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합니다.
그러던 중 효명세자가 죽자 김정희 부자의 운명 역시 위태로워집니다.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부친 김노경이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되고, 이후 김정희 부자는 한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되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김정희 역시 안동 김씨 세력의 공격을 받는데, 유배형 중에서도 극형인 위리안치형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위리안치형이란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벌이었습니다.
김정희는 머나먼 섬 제주도에서 가시 울타리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귀양살이를 하는 그의 유일한 낙은 책 읽기였습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서책을 구하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죠. 그런 그에게 때마다 찾아와 서책과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제
자 이상적이었죠.
권력이 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찾지만, 권력을 잃으면 한없이 소외되는 게 세상인심입니다. 김정희도 마찬가지였죠. 김정희는 부친이 권력에서 밀려나 귀양을 가면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희와 친분을 유지한다는 것은 당시 집권 세력인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 이상적만은 변함없이 김정희를 대했고, 김정희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그를 찾았습니다. 이상적은 중인 신분의 역관이었는데, 역관으로서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어렵게 구한 서책을 김정희에게 전해주었죠.
김정희는 이상적의 도움으로 끝까지 세상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학문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남긴 것이 그 유명한 <세한도>인데, 이상적에 대한 김정희의 마음이 <세한도>에 덧붙인 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겨울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했으니,
그대의 정이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절개와 지조가 아니겠는가.
- 김정희, <세한도〉 발문 중에서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나무로 유명합니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시들지 않고, 추운 겨울 모든 나무가 메마른 가운데서도 여전히 푸르른 나무죠 사실 <세한도>의 '세한‘은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 추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세한을 함께 버텨낼 소나무와 같은 벗이 있나요? 송백의 변치 않는 푸르름처럼 언제든 누구에게든 늘 한결같은 존중과 배려를 보이는 사람. 우리에게 버팀목이 되는 사람은 소나무처럼 언제나 한결같은 이가 아닐까요? (최태성 / 『일생일문』 / 생각정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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