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의(壽衣)

hope888 2022. 5. 30. 08:04

 

    

수의를 준비해두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 선물로 해드리기도 하는데 친정어머니께서는 젊은 날 손수 마련해 두셨다. 친가 나 외가 쪽 부모님이 단명하셔서 애달프게 살아온 어린 날의 얘길 종종 하시더니 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이 깊으셨는가 싶다.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어머니가 비방책으로 수의를 장만하셨다 해도 그 마음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는 평생 몸담은 교직에서 정년을 2년 앞두고 크게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다. 오래 살기를 바라 준비해 둔 수의를 입고 가시긴 했으나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은 영원한 이별 앞에 누구보다 큰 상실감에 빠진 어머니는 당신의 수의를 보기 싫은 물건 치워버리듯 장롱 깊숙이 구겨 넣고 잊어버리고 지내셨다.

지금의 친정집은 아버지와 어머니 노년의 꿈이셨다. 나이가 두 살 차이긴 해도 초등학교 동창으로 시작된 두 분의 인연은 참 길고 깊으셨다. 알뜰하고 검소한 생활로 너른 터전을 잡아 자식들 시집 · 장가보내고 노년을 평화롭게 손주들 재롱 보며 살기를 바랐는데, 단 며칠 병수발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가신 아버지가 무정하시다고 가슴에 그리움을 삭히며 홀로 90세를 넘어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셨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두어 달 빠른 어머니 생신상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 여자가 남편보다 먼저 생일상을 받느냐고 상을 밀어내시더니 혼자 남은 지금까지 생일 챙기는 자식들과 매양 갈등을 만드신다. 어머니가 아무리 그러셔도 해가 바뀌면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마음이 먼저 친정으로 향한다.

활짝 열어 반기는 대문을 들어서니 울창한 동백나무 숲에 남녘의 향기가 그득하다. 잘 정돈된 잔디며 정원의 나무들이 반갑다. 남쪽 끝 고향 집은 겨울이 그리 춥지 않다. 동백나무 밑 그늘진 곳에 굵은 참나무 기둥을 세위 표고버섯을 기르는 모양이다. 집안의 우환을 묵묵히 견디는 마음 여린 남동생의 분주한 손길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

오랜만에 뵌 어머니는 식사도 제대로 못 해 마른 몸이 더 왜소해지셨다.

힘들게 뭐 하러 오느라고 통박을 주셔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좋아하는 모습이 역력하시다. 어머니는 다른 때와 다르게 기다렸다는 듯 보자마자 손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지만 워낙 연로하신 어머니의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예사로 넘길 수가 없다. 뭔가 평소와 확연히 달라 보이셨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어머니를 안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잠깐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유언하듯 말씀하셨다.

"나 죽으면 네 오빠는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거 두는 자리는 항시 저 장롱 속이니 잘 기억했다가 네가 오빠한테 갖다 줘라. 괜히 헛돈 쓰게 하지 말고……."

그리고 꺼내 놓으신 상자 속에는 아버지 떠나시고 장롱 속에 아무렇게 넣어 둔 걸 다듬고 손질하셨는지 결 고운 삼베 수의가 반듯하게 들어 있었다.

딸보다 더 살갑고 정스러운 오빠는 무척 효자이기도 했지만, 부모님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자랑스러운 자식이기도 했다. 특히 어머니에게는 신앙과 같은 존재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절대적이었다. 행여 당신의 죽음 앞에 슬프고 당황할 오빠를 잘 챙기라며 몇 번씩 다짐을 두셨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너무나도 기막힌 소식이 왔다. 오빠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이 이런 것인가. 길흉회복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너무나도 뜬금없는 소식에 말문이 막히고 몸이 떨려왔다.

"엄마는 어쩌라구……." 어이없게도 그 순간 오빠의 안위보다는 어머니 걱정을 먼저 했지만, 못 믿을 얘기를 듣고 부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제 몸을 금쪽같이 아끼는 오빠가 아니었던가. 기침감기 치료차 대학병원에 갔다가 폐암 진단을 받게 된 것이라니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가족력도 없고, 불과 6개월 전에 건강검진을 받아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는데 폐 선암 4기로 전이가 시작되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의학의 배신이었다. 슬프고 서러워 울고 싶어도 행여 오빠 마음 약하게 할까 봐 격려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하며 잠시 망설임도 없이 치료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의사 말에 실낱같은 기대마저 끊어져 버렸다. 항암, 방사선치료 신약 표적 치료까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자며 매달렸다. 의사는 6개월 시한 판정을 내렸다. 어머니께 이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었는데, 아들에게서 늘 오던 안부 인사가 없으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운명의 신이 이리도 잔인한 세상만사 새옹지마라 했는데, 오빠는 환갑도 못 넘기고 6개월을 다 못 살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에 발을 구르고 몸부림치며 통곡하시는 어머니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태껏 효도가 무슨 소용인가 해졌다. 노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친정집은 오빠가 떠나고 어머니의 애통하고 서러운 눈물로 늘 촉촉하게 젖어있다.

때때로 "내가 먼저 갔어야 하는데……. 어찌 사느냐며 한숨처럼 중얼거리신다. 병원을 전전하고 약으로 버티고 계시지만, 죽고 사는 건 하늘의 뜻 아니겠는가. 이젠 수의 같은 건 관심도 없으신 어머니, 고단한 이 세상 떠나가실 때 곱게 입혀 드릴게요. (최혜숙 / 『한국수필』 2022년 5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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