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끼어 덕장에 매달린 명태들의 인간을 향한 말 없는 외침이 애틋하다. 애를 태울 내장도 없이 깡말라 버린 몸짓이 마치 모든 걸 비워낸 성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도대체 몇 구비의 고개를 넘었을까,
넓은 바닷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뜨거운 삶을 영유하던 한 시절이 꿈이었듯 아득하다. 화려한 욕망을 미련 없이 내 던지고 허탈한 서글픔에 지친 영혼처럼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뭉크의 <절규>를 연상케 한다.
이웃에 사는 막내는 가끔 가슴 답답한 어미의 숨통을 트여주기 위해 야외 나들이를 시켜주곤 한다. 딸도 딸이지만 장모를 배려하는 막내 사위의 마음 씀이 더 고맙다. 임진각이나 헤이리를 주로 가지만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먹거리도 풍성한 강원도를 더 자주 가는 편이다.
얼마 전 딸네와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한계령을 거쳐 용대리 황태덕장을 한 바퀴 돌아왔다. 몇 년 전 왔을 때만 해도 덕장들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언제부턴가 명태의 고장이라는 용대리의 지명이 무색할 지경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아 아쉽고 씁쓸하다. 명태마저도 값싼 수입품에 밀런 것인지 이즈음에는 신토불이를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 수입 자율화가 시행되고부터 모든 생필품은 물론 가정의 식탁에도 수입품이 넘쳐나고 있다. 소비자로서는 값이 싸서 우선 좋기는 하나 내 몸 건강에 미치는 영양을 생각하면 수입품에 대한 선입견인지 몰라도 괜스레 께름칙한 공포를 지울 수가 없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네 타듯 줄에 매달려 이리 흔들 저리 흔들리는 명태를 보니 내 마음도 춥고 쓸쓸해지는 느낌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은 유난히 황태국을 좋아했다. 육류는 기름기가 많다며 싫어했고 생선은 비릿하다고 싫어하셨다. 하지만 뜨거운 황태국을 먹으면서도 속이 시원하다며 황태가 주는 감칠맛 나는 개운한 맛을 즐기셨다.
부모님 건강을 염려한 자식들이 그래도 육고기를 먹어야 한다며 명절날이든 생신날이든 권해 보지만 기어이 어머님은 따로 북어를 끓여 드시곤 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왜 그리도 좋아하셨는지, 명태의 진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입맛이 별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묘한 것은 내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 입맛을 닮아가는 듯 명태국이 좋아지는 것이다.
이즈음 우리 집 식탁에도 일주일에 서너 번 명태가 올라온다. 명태는 해독 작용도 되고 끓여 먹기도 수월하고 매콤한 양념을 만들어 코다리찜을 해 먹는 날에는 그냥 밥 한 그릇이 뚝딱이다. 황태는 단백질도 풍부해 다이어트에도 좋고 숙취 해소에도 좋은 음식이다. 영양분도 많고 맛도 좋아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고 한다. 내 입맛에도 착착 감긴다.
명태는 변신의 고수인 것 같다. 바다에서 막 건졌을 때는 부드러운 생태로, 말렸을 때는 황태로, 그 밖에 모양과 크기에 따라 노가리 먹태 작태 동태 북어로도 불리면서 그 나름대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며 사람들의 입맛을 돋군다. 생태 명태는 시원한 국거리로 말린 것은 밑반찬이나 안줏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국으로 끓여 먹으면 주독을 씻어 속까지 시원하게 풀어주니 이보다 더 친근한 먹거리가 어디 있으랴. 값 또한 적당해 서민들의 식탁에는 최고의 영양식품이 된다.
눈다운 눈이 오지 않은 겨울이지만 기온은 여전히 영하를 맴돈다. 명태는 겨울 날씨에 따라 풍작일 수도 있고 흉작일 수도 있다. 얼었다가 녹고 또 얼다가 녹는 과정을 통해 끝없는 변신을 이룬다. 삶이 한바탕 소풍 길 같다는 말처럼 죽어서까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명태의 변신이 오늘따라 눈물겹게 다가온다. (문민순 / 『한국수필』 2022년 6월 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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